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라벤나]] 입성 (540년) ==== 이러한 참변 소식에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를 비난하였고[*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지원 병력이 무기력 했던 것도 잘못이긴 했다. 일부 학자들은 벨리사리우스가 나르세스를 좌천시키기 위해 일부로 밀라노가 당하게 놔둔 거라 하기도 하는데 신빙성은 낮다.] 밀라노가 말그대로 폐허가 되었다는 것을 보고받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역시 분노하여 나르세스를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이탈리아 군대의 지휘 계통이 다시 단일화 된 것이다. 이에 두려움을 느깐 동고트의 왕 비티게스는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1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벨리사리우스가 서방에 묶여있는 틈을 타서 제국의 동방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벨리사리우스를 동부 전선으로 돌리려는 책략이었고 결국 성공하여 동고트 왕국의 부흥으로 이끌었다. 다만 그것이 비티게스 대에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라벤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의 반격은 사산 제국의 침공 준비보다 빨랐다. 동방의 사정을 잘 알고있던 벨리사리우스는 속전속결로 라벤나를 함락하여 서방 전선에 몰려있는 군대를 적절히 재배치하려 하였다. 다시 벨리사리우스에게 충성하게 된 부장 요한네스와 마르티누스가 포 강 이북에 주둔하고 있는 울라리스가 이끄는 고트족의 도하를 막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반도 중북부에 남아있는 동고트 거점들을 일소하여 북진 시에 후방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부장 유스티누스가 파에술라이(피에솔레)를, 벨리사리우스 본인은 보다 더 강력한 거점인 아욱시뭄(오시모)을 포위 공격하였다. 포위가 한창이던 539년 여름, 강력한 변수가 생겼으니, 프랑크 왕국의 동부인 아우스트리아의 왕인 [[테우데베르 1세]][* [[클로비스 1세]]의 장남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이다. 티베르 1세로도 불린다.]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포 강에 도달,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운 것이다. 538년의 경우처럼 자신들을 지원하러 왔다고 생각한 동고트 측은 오히려 공격을 당해 패퇴하였고, 동로마 군대도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하였다. 기세 등등해진 테우데베르트 1세는 볼로냐에서 로마 황제처럼 자신의 얼굴을 새긴 금화를 주조,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닥친 위기였고,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었으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덮쳐 그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고 후퇴하였다. 시름을 던 벨리사리우스는 두 도시에 대한 포위에 치중하였고,[* 벨리사리우스 본인이 포위 도중에 죽을 위기를 넘겼던 아욱시움에 대해서는 시냇물에 시체, 독초, 심지어는 생석회까지 넣으며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539년 가을에 식량 부족으로 둘 다 항복을 택하며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은 평정되었다. 배후를 안정시킨 벨리사리우스는 달마티아에서 파견된 지원군과 아드리아 해의 해군과 합세하여 비티게스가 피신해 있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포위하였다. 늪지대로 보호받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해상권을 상실한 라벤나는 보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는 아욱시움에서 선보인 물에 독풀기와 더불어 특공대를 잠입시켜 식량 창고에 불을 붙이는 등 철저히 라벤나를 괴롭혔다. 한편,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 거부하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파견된 사절이 당도하였는데, 바로 이탈리아 분할에 관한 제안이었다. 임박한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대를 동방에 집중시키고 싶었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포 강을 경계로 북쪽은 그대로 동고트 족의 지배를 인정하며 전쟁을 일단락 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포위되어 물자가 떨어져가던 비티게스와 고트족 측은 대환영하였고 오랜 전쟁에 지친 동로마 측의 장병들과 장군들도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반대 의사를 표하였다. 라벤나 포위를 위한 지난 몇달 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의 강경한 태도에 절망한 동고트 측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바로 적장인 벨리사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것이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한 반역을 꾀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라벤나 접수를 위하여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540년 5월, 동로마 군대는 고트족의 수도인 라벤나에 입성하였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는 태세를 전환하여 비티게스와 동고트 수뇌부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이송하였다. 다만 민심 안정을 위해 고트족이건 현지 로마인이건 거주민에 대한 약탈은 엄격히 규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